2004.01.19,20:10에 잔업처리하고 차를 몰고 귀가 길에 올랐는데 폰에 전화가 왔다.
얼른 이어폰을 귀에 꽂고 들어보니..
"양기덕씨? 맞습니까"
"네 그런데요..."
"저 중학교 동창 인식인데, 알아보겠는가?"
"누구라고? 인시기라,,,누구더라..."
"저 대서에서 통학하던 신인식인데..."
"아~~인식이...알제, 하믄 알고말고가 어디있어. 그래, 지금 어딘가?"
"여기는 미국 라(LA)~네. 휘유, 그래 우리 얼매만인가? 자네 찾느라 얼마나 애 먹은줄 아는가? 무척 반갑네..."
"나 지금 운전중이거든 너무 반가운 김에 핸들이 흥분하고 있네..."
"그래? 그럼, 내가 있다가 자네 집에 도착한 후에 전화 할께.."
"아니지 여기 발신인 전화번호가 찍히니까 내가 집에 가서 전화함세..."
"몇분후에 집에 도착하지? 그 시간 맞전화해야 되니까... 이건 국제전화거든, 자! 차사고 내지 말고 빨리 집에 들어가 있게나. 곧 전화 다시 걸테니까..." 딸깍
야 정말로 반가웠다. 내가 중학교 졸업하고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친구이고 보니 더욱 더 그리웠다. 그는 학창시절 때 꼭 '샌님'스타일이라 몹시 수줍어 하고 겸손하기만 했었다. 거기에 나와는 우등생으로써 석차를 다투고 했던 선의의 경쟁자이기도 했다. 다만 그가 집안사정으로 인하여 이사를 자주 다니고 그러다가 결국엔 '이민'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난 생계를 이어 가기 위해서 진학은 꿈도 꾸어보지도 못한체 농촌에 묻어살게 되었던 터라‥‥‥.
집에 도착하여 핸드폰의 발신자를 확인을 해 봤으나 번호는 없었다. 다만 00만 있고..
잠시후 그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사랑하는 아내가 전화를 받고 놀래며 전화기를 건네 준다)
인식이를 통해서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중학동창들의 소식을 속속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이른바 '상류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광사'(나와 학생회장선거에서 다투었다. 비록 그가 회장에 당선 되었었다)는 지금 '대한항공'전무로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임득규'는 학창시절에 '대두'란 별명을 달고 있었는데 '육군3병원의 인사장교로 근무하다 몇년전 '대령'으로 정년 퇴직을 하고 지금은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고 했다.
'신봉식'이는 대곡초등학교 교감으로 재직 중이고, 이도형이는 무안초등학교에서, 박형렬은 부산 양정초등학교에서 각각 교편생활을 하고 있다고... 어쩌면 외국에서도 국내사정을 나 보다 그리 소상히 알고 있는지... 내가 부끄러워 지는건 어쩔 수 없었다.
아~~그리웠던 학창시절이 마냥 그리워 지는구나!
그와 거의 삼십분 정도의 통화를 마치고 다음 상면기회가 빨리 오기만을 기대하는 수밖에‥‥‥.
어쨋든 2004년도 접어들어 가장 반가운 전화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아빠의 활동구역(?)을 이제부턴 미국에 까지 넓혀 볼까 한다.
사랑하는 가족들이여!!
인생은 정말로 재밌는 거란다.
인연이란 그저 하찮게 생각 해서는 안되는것 항상 나와 같이 생활을 하게 되는 모든 인연들을 소중히 간직 해 나가기를!!
'신인식'그친구 말이 멋있지.
"양기덕"하면 '영어 젤 잘하는 학생'으로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고.
하기야 모두들 영어공부하기를 지옥에 가는것 보다 더 무서워 했었으니까.
시골 촌놈들 치고 누가 꼬부랑말 배워 어디에 써 먹을라고? 했던게 그 시절 농촌의 실제 사고방식이었으니.(그러고 보면 내겐 선각자 기질이 조금쯤은 있었나 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쉽게 학업을 포기 해 버린것이 천추에 한이 된다.하지만 어쩌리 이젠 과거사가 되어 버린걸‥‥‥.
그래서 말인데 너희들은 바보같았던 아빠의 전철을 밟지 말고 무엇이든지 '절대 절대로 포기 하지 말기를!!
자 우리 모두들 힘차게 앞으로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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