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지만
모두가 같은 세상을 보는 것은 아니다.
같은 문장을 읽고도
누군가는 희망을 읽고,
누군가는 불만을 읽는다.
같은 현실 앞에서도
누군가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누군가는 한계만을 본다.
이는 단순한 지식의 차이가 아니다.
그 사람이 살아온 경험, 사유의 깊이, 내면의 구조, 그리고 세계를 받아들이는 ‘그릇의 크기’의 차이이다.
인천 사람은 서울을 동쪽에 있다고 말하고,
강릉 사람은 서울을 서쪽에 있다고 말한다.
서울은 움직이지 않았으나 사람의 위치가 다르기에 방향이 달라진다.
진리는 종종 이와 같다.
세상은 고정되어 있으나 인간은 자기 위치에서만 세상을 해석한다.
그러나 미숙한 인간일수록 자신의 방향만이 절대적이라고 믿는다.
자신의 좌표를 진리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선과 악,
옳음과 틀림,
긍정과 부정이라는
단순한 흑백의 이분법으로 재단하려 한다.
하지만 동양의 고전은 오래전부터 세계는 음과 양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흐름이라 하였고,
서양 철학 역시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변화 속 과정이라 통찰하였다.
노자는 말한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다투지 않으며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도 결국 바위를 깎고 바다를 이룬다.
작은 도랑물은 시냇물이 되고,
시냇물은 강이 되며, 강은 마침내 바다에 이른다.
그러나 흐르지 못한 물은 썩는다.
자신의 생각만 옳다 믿고,
타인의 시선과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시대의 흐름과 소통하지 못하는 순간 사람 역시 ‘고인물’이 된다.
고인물은 처음에는 깊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흐름을 잃은 순간
생명력을 잃는다.
물은 흐르기에 살아 있고,
사상은 움직이기에 발전하며, 문명은 서로 섞이기에 진화한다. 유연함은 비굴함이 아니다.
흐른다는 것은 중심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생명력이 있다는 뜻이다.
대나무는 강풍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다. 몸을 굽힐 줄 알기 때문이다.
반대로 지나치게 단단한 나무는 태풍 앞에서 먼저 부러진다.
인간의 품격 역시 그러하다.
진정한 품격은 많이 아는 데 있지 않고, 다름을 받아들일 줄 아는 여백에 있다.
인격의 깊이는 자신의 주장만 강하게 말하는 데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관점 속에서도 부분적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사유의 유연성에서 드러난다.
결국 세상은 누가 더 크게 소리치는가로 움직이지 않는다.
누가 더 깊게 이해하는가에 의해 발전한다.
바다는 모든 강을 품기에 바다가 된다. 가장 낮은 곳에 있기에
모든 물이 스스로 흘러든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작은 그릇은 다름을 공격하지만,
큰 그릇은 다름을 포용한다.
흐르는 자는 살아남고,
고이는 자는 증발한다.
자신의 생각에 갇힌 사람은 세상을 판단하려 하지만, 세상의 흐름을 이해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비운다. 그래서 고전은 끝내 같은 말을 남긴다.
“강한 것은 부러지고,
유연한 것은 살아남는다.
인간의 성숙이란 세상을 흑백으로 단정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수많은 회색과 결을 이해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 좋은 글 중에서 >